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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 & 디자이너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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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디자이너, 글로 표현하는 사람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만났다. 강신주와 김재훈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을 월간 <디자인>이 주선했다. 거리가 좀 있을진 모르겠지만, 철학과 디자인 사이에도 접점은 존재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이들의 대화에서 철학자와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과 인간적인 디자인에 대해 들을 수 있다. 월간 <디자인>은 디자이너와 인문학자, 과학자, 소설가 등 다양한 분야 명사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대화를 통해 이 시대의 디자인은 어떻게 사회와 소통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 어떤 지향점을 갖고 변화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정오, 이태원에서 철학자 강신주와 디자이너 김재훈이 만났다. 이전에 글과 그림으로 만났을 뿐 실제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신주는 이번 만남을 위해 김재훈의 책 <디자인 캐리커처>를 읽었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김재훈은 강신주의 대표작부터 온라인 강의까지 챙겨 볼 정도였고, 만나기 전에 직접 그린 강신주의 캐리커처를 선물했다. 캐리커처 속의 강신주는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철학자였다.

강신주 그려주신 캐리커처를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더니 제자들이 무섭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너희는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지?” 하고요. 화가 나거나 가혹한 논평을 써야 할 때 가끔 그런 모습이 됩니다. ‘나도 참 독한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김재훈 평소 선생님 글은 온화하고 부드럽게 와 닿는데, 가끔 산업 자본주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대단히 노기를 띠시더라고요. 그런 면을 포착해봤어요. 사실 선생님의 온라인 강의도 거의 다 들었고, 만나기 전에 미리 추천해주신 책도 다 읽었어요. 제가 원래 한번 꽂히면 끝까지 파고 들거든요. (웃음)
강신주 지난 주에 편집장님을 통해 선생님의 <디자인 캐리커처>를 받아보았습니다. 정말 좋았어요. 처음엔 디자인 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선생님과 같이 작업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글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김재훈 사실 제가 <디자인 캐리커처>를 쓸 때 주변에서 ‘네가 디자인에 대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해?’라는 반응이 있었어요. 저도 제가 디자인에 ‘어떤’ 해석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디자인이 인문학, 철학, 사회와 관련됐을 때 내 생각이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강신주 현대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이든 ‘제자리에 어떻게 돌려놓느냐’입니다. 노숙자가 왜 생기는 줄 아세요?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화된 교육을 받는데, 전문화된다는 것은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전문 영역에서 일할 자리를 잃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발전을 위해 하나의 개념을 파고들어 특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인간적인 가치로 되돌아봐야 합니다. 한 부분만 특화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막’ 간다면 꺾어버리기도 해야 합니다. 쪼개진 한 부분만 발달하게 되면 자본주의에 포획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핵분열처럼요. 어떤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 된다는 건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올라갔다가 내려와야지, 그렇지 않고 계속 올라가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게 돼요. 무슨 일이든 인간적인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신주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강연과 책을 통해 대중과 나누는 철학자다.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공대로 입학했으나 철학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공저 8권을 포함해 24권의 책을 냈다. 2011년 2월 출간한 인문 공감 에세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철학책으로는 보기 드물게 6만부가 넘게 팔렸다. 대표작으로는 철학의 눈으로 시를 들여다 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56개 주제에 대해 라이벌 구도의 철학자들을 대립시킨 철학사 <철학 VS 철학> 등이 있다. 시인 김수영을 정신적 아버지로 여기며, 쉽게 읽히는 철학을 지향한다.

김재훈 전문화를 다시 말하면 분업화라고 할 수 있어요. 물건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에만 참여하니, 내가 어떤 물건을 만드는지 알 수 없는 거죠.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직접 사용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면서 물건을 바라봐야 하는데 말입니다. 디자인이 전문화되면서 그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강신주 정확하게 보셨네요. 대승불교의 정신 중에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게 있습니다. ‘자신을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지요. 자리이타는 전문가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작가라면 글을 쉽게 써야 사람들이 읽을 거고, 그래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김재훈 디자이너들은 아직도 자신이 하고 있는 디자인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실제 이상은 높지만 현실적으로 하는 작업은 더욱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어요. 인간은 진보하기 위해 삶과 물건에 끊임없이 집착하고 디자인을 합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사물과 환경을 개선시키고요. 철학자 빌렘 플루세르(Vilém Flusser)는 <디자인의 작은 철학>이라는 책에서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들여놓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 곧 디자인이다’라고 말했어요. 방해물은 끝이 없습니다. 물건에 집착하는 노예가 되어가는 거지요. 하지만 물건을 진보시킬 수 있다는 매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디자인을 놓을 수 없는 겁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디자인을 이야기하다
첫 만남이라고 하기엔 전혀 어색함이 없는 자리였다. 점심 식사 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디자인이라는 주제에는 미학적인 관점의 이야기가 어울릴 것 같지만 이들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의 대화는 편집자가 낄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 대화에서 좋은 디자인의 기준은 ‘사람’이었다.

강신주 좋은 디자인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철학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의 가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는가 하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도한 럭셔리는 사람 사이를 멀게 한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공공장소의 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겁니다. 사실 어떤 관계가 미리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디자인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가 더욱 좋아진다면 좋은 디자인일 것 같은데, 타인의 문제는 모두 나중에 결정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걸 만들었으니 행복해야 해’라고 하는 건 오만한 태도입니다. 결과적으로 타인이 행복해야 해요.
김재훈 디자이너는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겠지요. 문제는 그때의 타인이 대부분 클라이언트라는 겁니다. 디자인은 전적으로 돈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이런 면을 터부시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디자인하는 것에 대한 진짜 타인이 누구인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한미 FTA 문제로 촛불시위가 열렸을 때 광화문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 노점상에서 붕어빵과 어묵을 사 먹고 있는 어느 부녀를 보았습니다. 그 아빠와 딸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어요. FTA라는 거대한 담론에 대해 분노하고, 못마땅한 현실을 개선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고단한 일상을 보내느라 참가는커녕 관심조차 갖기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사람들까지도 들여다보고 혜택을 주는 디자인이야말로 진짜 보편적인 의미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디자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후미진 곳까지 들여다보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들어요.
강신주 현대 자본주의가 사유 재산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디자인이 사유화됩니다. 디자인을 구매하는 개념이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 돈이 있어야 디자인을 합니다. 거기서 적정선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과거 원시인들은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간 스스로 좀 더 행복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요. 노동하는 시간과 벽화를 그리는 시간을 나눴을 때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벽화 그리는 시간이 늘어나겠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사냥해놓은 먹이가 없으니 배가 고파 벽화를 그릴 수 없게 됩니다. 내 자리가 어디에 있고, 그 자리에서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영역을 좀 더 늘리면 디자인의 힘이 더욱 강력해질 것 같아요. 그럼 얼마나 좋아요.
김재훈 얼마 전 대학생들이 만든 노숙자들을 위한 종이 집이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디자인의 사례였지요.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이 디자인이 정말 노숙자를 보호하는 도구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할 텐데, 실제 SNS를 통해서는 최초의 아이디어를 누가 낸 것인지에 대한 것과 대학생들이 이를 도용했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갔습니다. 화가의 서명으로 저작권을 표기하며 사유화를 일으켰던 예술과 달리 보편화된 모듈을 추구하는 디자인에서 저작권이라니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마치 예술이 상징 자본을 얻기 위해 비주류의 틈새를 선점해 주목했던 것과 같은 움직임이 디자이너 사이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권력 지향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강신주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됐을 때 권력은 문제 될 게 없지요. 잣대는 그 행위의 바닥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디자인할 때 타인를 생각하면 그 사람이 어떨 때 행복한지 알려고 하고 읽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받은 사람은 알 겁니다. 설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를 좋아하는데 헛발질했구나 하고요. 마음만은 느낄 수 있어요. 그 마음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가 궁극적인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디자인은 사물을 개선해서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또 디자인이 멋진 사물에서 영향을 받고, 다시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좋은 인테리어 공간에 갔을 때, 예쁜 옷을 입었을 때 행복합니다. 자본은 그런 속성을 알기 때문에 디자인을 이용합니다. 행복을 줄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줄 것처럼 하는 것과 진짜 인간을 위해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순간에 바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가진 고귀한 것의 대부분은 바로 보여줄 수 없어요. 시간이 지나야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변심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일단은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믿고 박수 쳐주고 도와줘야 해요. 한 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5년 뒤, 10년 뒤에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재훈 이제 새로운 디자인은 기능이나 기술적으로 나아진 제품이라기보다는 소비를 증진시키고 부가가치를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됐습니다. 그게 과연 선의의 디자인인지 아닌지 나누는 잣대를 대중이 가지기는 어려워요. 대중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유행을 따라가게 되지요. 과거에는 상류 문화에 일조하는 것이 예술이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몇몇 디자이너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자신이 디자인하는 물건의 주 소비 계층을 누구로 보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어요. 샤넬의 경우 초창기의 작업은 여성들이 입기 편한 옷을 디자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현재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는 최상류층을 위한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상류층의 기호에 맞는 고급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능한 디자이너가 그런 작업을 계속하는 이상 다른 계층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겁니다. 상류층을 위한 디자인은 실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예요. 미학적인 장식이 곁들여진 제품을 기호로 소비하는 겁니다. 명품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본다면 해악이라고 하지만 아마 계속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강신주 문화는 다양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에 상류, 하류라는 수직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가격에 의해 고급이다 저급이다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관계에서 봐야죠. 가격으로 세운 수직적인 잣대에서 고급성을 나누니 비싸야 명품이지, 싸면 명품이 아니라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시인 김수영의 꿈은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시는 자기 자신이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거든요. 어디서 들은 얘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오로지 자신 만이 하는 이야기가 시라는 겁니다. 디자이너의 꿈은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돈을 주고 구매하지 않아도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장치를 만들어주는 것이죠.
김재훈 좋은 디자인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멋있다, 세련됐다, 도회적이다’라는 느낌이 들어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구적인 느낌이고요. 도회적인 것의 반대는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지역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촌스러운 것도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은 그렇질 않아요. 현실에서는 작고 촌스럽고 지역적인 디자인이라도 그 가치를 존중해주는 풍토를 만드는 일이 어렵습니다. 유행을 좇지 않고 작은 것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훈 디자인 이야기를 만화라는 형태로 쉽고 재밌게 풀어낸 <디자인 캐리커처>의 저자. 신학과 종교 철학을 선택했다가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해 진로를 바꿨다.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그림과 디자인을 배웠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영상디자인 전공 과정을 수료했다. <중앙선데이>에 연재했던 ‘디자인 캐리커처’는 2권의 단행본으로 나왔으며, 현재는 문화 전반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혀 ‘VS 문화 캐리커처’를 연재하고 있다. 인문 서사와 정보를 어떻게 하면 만화라는 매체에 갈아 태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인문•철학•역사•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그림•만화라는 매체에 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해답은 디자인에서 찾아야 한다
최근 몇 년간 디자인계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그리 쉽게 사그라질 거품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을 위한 것을 만든다고 하면서 이제야 인문학을 운운하는 것이 좀 늦었다 싶기도 하다. 이제야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에 대한 해답을 인문학에서 찾으려고 한다. 과연 인문학이 디자인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김재훈 역사적인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방향을 틀어 초기의 디자인 정신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게 문제예요. 그런데 또 살펴보면 항상 양면성이 있긴 했어요. 바우하우스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생활로서의 디자인을 내세우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영국에 뒤처진 독일의 국가 경제에 일조하겠다는 취지도 있었으니까요.
강신주 그런 문제 의식을 갖는다는 게 디자인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건강한 겁니다.
김재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무관심했던 탓에 청정 지역을 유지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양면성 중에서 그래도 더 좋은 면을 살리는 쪽으로 발전시켜야죠.
강신주 스스로 잣대를 가져야겠죠. 저는 강연에 가면 ‘예술적으로 살고, 인간적으로 살고, 인문적으로 살자’고 합니다. 그럼 저한테 되물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사느냐고. 그럼 얘기합니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려고 한다고요.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른 거예요. 내가 그렇게 못 한다고 해서 옳은 게 그른 것이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을 지향해야 해요. 현실은 이상의 잣대에서 봤을 때 보입니다. 그러니 이상을 품지 않은 사람은 절대 현실을 볼 수 없어요.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는 것이 삶이에요.
김재훈 저는 디자인을 할 때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문화•예술은 당연하고, 자연 과학 분야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문학과의 소통이 있었습니다. 디자인 분야는 인문학에 관심 있는 몇몇 분만 파고들었죠. 디자인에서도 더 이상 인문학과의 소통을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인문학 공부에 대한 열풍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들은 인문학을 교양 수준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에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것을 찾아 보다가 거기서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겠죠. 이제 디자인이 일상의 문화가 되어 버린 지금, 반대로 선생님 같은 철학자나 인문학자, 사회학자들도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의견을 말씀해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까지 오랜 시간 예술이나 문화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신 것처럼요.
강신주 아니요, 저는 반대합니다. 철학, 인문학, 사회학에서 말하는 이념과 디자인에서 말하는 창조의 영역은 다른 영역이에요. 저는 디자인에 이념이 들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처럼 디자인에 애정이 있는 분이어야 디테일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쓴 사랑 이야기와 사랑에 관한 책을 읽고 쓴 이야기는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디자인 내부에서 우러나온 성찰이 디자인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해 선생님께서 좋은 글을 써주시면 그걸 보고 저 같은 사람도 디자인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김재훈 저는 디자인이 창조의 영역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최근 들어 디자인 분야에서 점점 미학적인 면을 강조시키고 있으니까요. 현대 미술의 길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걸 디자인의 타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디자인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문화 사회학의 다각적인 영역에서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하우스 (2012년 4월호) ⓒ Desig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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