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file
드라마센터 ‘동랑 레퍼토리컴퍼니’에서 연기를 제외한 모든 일을 맡았던 연극인이었다. 돈 안 되는 본업 때문에 1970년대부터 아르바이트로 다방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생계 유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된다. 5년간 한샘 광고 실장을 지내며 한국 최초로 컬러로 된 가구 카탈로그를 기획했으며, 종합 문화 예술지 을 발행하기도 했다. 국제 화랑 레노베이션, 타워팰리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등을 디자인했다. 1984년 설립한 옴니디자인은 인테리어 디자인 사관학교로 불릴 만큼 수많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배출했다.대표님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계를 이끌어오셨음에도 그 영향력에 비해 미디어에 노출이 많지 않았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누린 혜택을 생각하면 내가 한국 공간 디자인계에 해야 할 이야기가 분명 있습니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하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번에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혼자 생각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대표님은 원래 연극을 하셨던 걸로 압니다. 극단 활동도 하셨는데, 어떻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24세에 연출가를 희망하며 드라마센터 ‘동랑 레퍼토리컴퍼니’에 들어갔지만, 연출할 기회가 제게 선뜻 오지는 않았습니다. 무대 디자인에 관여하고 기획실 책임을 맡고 연극 마케팅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당시 연극계에는 마케팅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지만 마케팅을 시작했어요. 10여 편의 연극 포스터와 티켓 등 홍보 인쇄물을 디자인했습니다. 나는 상당히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포스터 하나를 만들어도 인쇄소에 직접 가서 조판이나 사진 식자 같은 작업에 일일이 다 참견해야 직성이 풀렸어요. 아침에 들어가 저녁에 포스터를 안고 나왔습니다. 하청을 주면 일주일 이상 걸리는 작업이 내가 가면 하루 만에 해결되니 사람들이 놀라곤 했습니다. 닐 사이먼(Neil Simon)의 <베어풋 인 더 파크Barefoot in the Park> 같은 연극은 젊은 신혼부부가 주인공인데, 신혼집으로 뉴욕 브라운스톤 펜트하우스가 무대입니다. 무대 위에 바로 스튜디오 펜트하우스를 지었습니다. 감각적인 펜트하우스를 보여주기 위해 거실, 화장실, 부엌 같은 공간도 구획하고 소파와 변기도 배치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지요. 크롬 도금한 파이프로 스탠드 조명등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뉴욕 펜트하우스를 상징하는 공간을 만들었을 때 저도, 관객도 함께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명동에 다방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종종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 월급이 13만 원인데 다방 하나 지으면 150만 원을 받았어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실내 장식이라는 단어도 없던 시기였습니다. 장치가도 아니고 그저 장치해주는 사람이라고 불렀죠. 1978년 즈음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카페나 집을 지어달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별한 계기로 디자이너가 된 건 아닙니다.
1970년대에 부업으로 디자인한 가게 중에 명소가 된 곳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심수봉 씨가 데뷔한 바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나 국내 최초의 카페였던 ‘장미의 숲’ 등이 있었죠. ‘장미의 숲’ ‘예전’ ‘클라식’ 같은 네이밍도 내가 직접 했습니다. 이 가게들이 장사가 잘되면서 나를 찾는 클라이언트가 많아졌지요. 출세작들입니다.
1984년 옴니디자인을 설립하기 전에는 한샘에 계셨던 걸로 압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1970년대 초반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주택을 시공만 해달라고 의뢰한 고객이 있었습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까지 구축한 대단한 부자였죠. 덕분에 나는 당시 남들은 경험할 수 없는 디자인을 경험했어요. 전 세계에서 원하는 자재를 가져올 수 있었거든요. 그 집의 부엌 가구를 만들고자 한샘도 들락날락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샘건축연구소에 입사했어요. 건축 설계 업무를 하다가 부엌 가구 회사가 커지면서 광고 마케팅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제품디자인, 기획, 개발 업무에 관여했지요. 국내 가구 회사 최초로 컬러 카탈로그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찍은 광고가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 주명덕 선생님과 함께한 ‘시스템 키친 한샘 유로’입니다. 한샘을 그만두고 1984년 옴니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습니다. 회사 이름 아래 조그맣게 ‘commercial planning & motivation’이라고 적어 넣었죠. 주변에서 ‘대체 넌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면 ‘모티베이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뭐냐고 되물으면 “바람잡이야”라고 말했어요.(웃음)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제한해 일하지 않고 디자인 계획부터 마케팅까지 전반적인 업무를 했습니다. 광고를 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1, 2, 3 1997년 오픈한 카페 ‘플라스틱(Plastic)’.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된 카페다. 노출 시멘트 외관이 단순해 보인다. 내부 역시 흰색과 검은색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실내에 나무를 심어 자연 친화적인 느낌을 살렸다.198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현대적인 디자인 개념이 굉장히 명확했던 것 같습니다. 가게 하나를 해도 무엇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또한 업소명은 어떻게 도출해야 하는지 통합적인 개념에서 보여주려 했습니다. ‘옴니’라는 회사 이름도 라틴어로 ‘전체’라는 뜻입니다. 통합 디자인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에서 붙였습니다.
대표님은 지난 30여 년 동안 600여 개의 리테일 숍을 디자인했습니다. 대표적인 한국의 디자이너 부티크, 지아니 베르사체, 질 샌더 같은 수입 명품 매장부터 카페 ‘인터뷰’ ‘플라스틱’ 등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도 다양합니다. 상업 공간을 작업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무엇인가요? 클라이언트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첫 번째 역할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클라이언트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 서비스입니다. 어떤 이들은 디자인 정신을 거대한 철학으로 포장하지만 사실 디자인 정신도 고객의 이익과 통해야 합니다. 이는 상업 행위 자체가 악행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맨 마지막 고객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길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상업 공간을 하다보면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됩니다.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대표님만의 방법이 있는지요? 상업 디자인의 해답은 디자이너보다 클라이언트가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사람이 클라이언트이니까요. 이 고민과 생각을 듣는 데서부터 상업 공간 디자인이 시작됩니다. 해답은 클라이언트에게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캐묻고 의논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고객이 대다수이니까요.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종종 충고처럼 이런 말도 합니다. 당신을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것도 디자인 용역비에 포함되어 있다고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30여 년 동안 상업 공간유행을 선도했다면 트렌드에 민감하실 것 같습니다. 트렌드를 좇는 게 아니라 트렌드를 읽어야 합니다. 전 잡지를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한 동안 잡지를 보지 않은 적도 있어요.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를 읽는 내 정신과 시각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전문 잡지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디자이너들이 있는데, 그건 디자인을 베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한 이미지를 대충 짜 맞춰 디자인하면 안 됩니다. 클라이언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런 방식을 취한다면 인정할 수 있지만, 디자인 개발에서 그런 과정을 밟는다면 과격하게 말해 ‘쪽 팔리는’ 디자이너가 되는 겁니다. 이 질문에 나는 열외인가 묻는다면,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죠. 하지만 적어도 난 그런 부분에 강박관념이 있다는 겁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어떻게 안 할 수 있을까 반드시 고민하지요.
1977년 디자인한 한마당 파스타와 한마당 갤러리. 한마당 파스타는 르 꼬르뷔제에 대한 오마주다. 롱샴 성당의 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한마당 갤러리는 한옥 갤러리의 시초라 할 만하다. 나란히 자리한 두 건물이 보여주는 모던과 전통의 대비가 경쾌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대표님의 디자인 특징으로 많이 꼽는 키워드가 ‘모던’과 ‘단순함’입니다. 이런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오랫동안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사실 전 굉장히 다양한 일을 해왔습니다. 1990년대 초에 잘나갔던 빵집 ‘올리브 베이커리’는 모던하기보다 내추럴한 공간이에요. 헌 나무로 마감했거든요. 내가 아니라 대중이 기다리던 디자인을 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경제적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을 고려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했다면 모던하게 했겠죠.
모던한 디자인을 유독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눈 뜨고 처음으로 본 세상이 전쟁 직후의 폐허였어요.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가 바로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대문 시장 근처였습니다. 부모님이 한동안 군수 물자 폐품을 파는 장사를 했는데 마당 한쪽에 항상 탄피, 탄환통, PX 물품, 포크나 나이프 같은 미군이 쓰다 버린 물건이 쌓여 있었습니다. 초콜릿이나 사탕도 많이 얻어 먹었죠. 내가 본 그 어떤 물건보다 컬러풀하고 반짝이는 재질이었습니다. 1940~60년대 미국은 황금시대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승국이었으며 군수 사업을 일으켜 거대한 슈퍼 국가로서 자본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죠.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같은 바우하우스 사람들조차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머물던 시기입니다. 바우하우스가 꿈꾼 공업 생산을 실제적으로 양산한 시대가 미국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 세계의 최첨단 디자인을 봤다는 겁니다. 그 당시의 첨단 ‘에지’를 본 거죠. 군대처럼 완벽하게 통합된 디자인 물품을 보여주는 곳이 어디 있나요? 군대는 CI, 제복 등 모든 디자인을 통일합니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데다 인간이 사용하기 편한 휴먼 스케일입니다. 디자인 지향적인 ‘세계’가 전쟁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겁니다. 이걸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지만 난 우리 집 마당에서 미국의 중심부를 봤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미국의 애리조나나 텍사스에서 볼 수 없는 걸 서울에서 본 겁니다. 하얀 백지 상태 같은 감수성으로 이를 받아들였어요. 찬양이 아니라,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일상에서 자연스레 서구적인 시각 훈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낯설어서 신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름답게 느끼셨나요? 그것을 계속 몸으로 접했으니까요. 전 앤디 워홀의 그림 값이 오르기 훨씬 전부터 그를 좋아했습니다. 미국의 대중 문화를 소비하며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이 앤디 워홀의 알록달록한 참스(charms) 사탕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그럼에도 대표님이 나고 자란 곳은 지역적으로 ‘한국’이지 않습니까? 명동을 헤집고 다니던 20대 때 나는 갈등을 했습니다. 나는 왜 삼일빌딩 앞에 가면 기분이 좋은데, 남대문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나는 남대문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 몇 시간 동안 남대문 앞에 멍하니 서 있기도 했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타임>이나 <뉴스위크>에서 익힌 잘 짜인 그리드 시스템, 이를 통해 서구적인 시각 질서를 획득한 내가 바라본 한국성은 낯설었습니다. 모던한 공간에서만 한국적인 디자인이 강한 대비로 보이는 겁니다. 거기서 좌절했어요. 내 핏속에 있는 한국성을 나는 왜 이렇게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렇다면 대표님은 한국적인 디자인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신 건가요? 기와가 이루는 지붕의 선, 버선코의 곡선, 팔작지붕의 우아한 형태, 이런 걸 흔히 한국적인 선이라고 합니다. 온통 형태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어느 날 창덕궁의 랜드스케이프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창덕궁은 연못을 파서 정자를 만든 게 아니라 움푹 들어간 자리에 그냥 정자를 ‘넣은’ 겁니다. 땅의 자연스러운 생김새를 따른 거죠. 이걸 보고 한국적인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내 짧은 지식으로 짐작하자면 우리 전통에는 정확한 도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골 민가를 짓는다 칩시다. 집터를 구하고, 주변에 있는 재료를 종합하고, 몇 칸짜리 규모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상황을 머릿속에서 끼워 맞춰가며 실제 집 짓는 행위를 할 겁니다. 집주인과 집 짓는 사람은 계속 대화를 합니다. 그 사이에 집 짓는 주변 상황이 계속 개입합니다. 서양의 집은 완벽한 설계 아래 되도록 오차 없이 지으려 하는 반면, 한국은 ‘상황’을 계속 설계에 반영해나가는 거죠.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이 유기적인 과정이 바로 내가 발견한 우리 공간의 표현성에 관한 정서이자 한국성이라고 생각합니다.

1 2002년에 설계한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이 갤러리가 들어선 이후 천안 시내 풍경은 급격하게 변했다. 거대한 규모의 미니멀리즘 조각 같은 모습이 강렬하다.
2 코엑스와 명동 등에 들어선 이탈리안 음식 전문 체인점 리틀 레이디. 전체 공간 매뉴얼 디자인을 했다.
이런 정서를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작업을 하다가 디자이너로서 ‘여기까지만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 나머지 일은 고객의 일입니다. 그들이 개입할 여지는 남겨두어야죠.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간 표현성에 관한 여유입니다. 이 정신을 잘 이끌면 함께 만든 넉넉하고 여유 있는 공간이 형성됩니다.
대표님이 디자인한 공간을 보면 재료의 물성이 굉장히 강조된 듯합니다. 사실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꺼운 철판이나 노란 덩어리를 덩그러니 놓고 관람객에게 여기서 대체 무얼 느낄 것이냐고 물은 미술의 미니멀리즘은 서사성과 장식성을 극도로 배제해 사물의 원형과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건축에서는 집이 병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장식을 몰아낸 후기 근대가 있습니다. 비인간적으로 ‘창백한’ 후기 근대에 스토리와 유머를 집어넣은 포스트모던은 아르누보 이후 현대적 장식성이 다시 사람을 찾는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건축에서 미니멀리즘이 나옵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사람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은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로젝트, 즉 사람을 찾아 떠난 것이 건축과 디자인에서의 미니멀리즘입니다. 내가 공감하는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초반의 미술 사조와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거대한 철판을 그 자체로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본질 앞에 선 사람의 실존을 모색하는 겁니다. 본질 앞에서 사람이 보이길 원했습니다.
(왼쪽) 1993년에 디자인한 고깃집 소나무. ‘고깃집’은 고 한창기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이, ‘소나무’는 이종환 대표가 내놓은 단어다. 지금 봐도 손색 없을 정도로 모던하다.미술의 미니멀리즘은 감상의 대상이지만 디자인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생활에 천착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상 디자인의 미니멀리스트는 질 샌더예요. 부풀리고 왜곡한 옷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함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을 한참 하다 보면 시시해집니다. 본질은 이제 알겠으니 그다음이 뭐냐고 묻기 시작합니다. 요즘 대두되는 이슈가 그런 겁니다. 미니멀리즘에 원시성이나 복고적인 무엇이 접합되는 거죠. 앞으로 달라진 미니멀리즘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난 철저한 미니멀리스트는 아닙니다. 후기 근대의 잔재도 있어요.
오랫동안 단순한 디자인만 하다 보면 다른 스타일도 시도해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디자이너가 어떤 한 사람을 추종한다고 합시다. 일관성 있게 한 사람을 따라가면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도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 근데 요즘 디자인을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베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용산구청 앞에 가면 렘 쿨하스, 다니엘 리벤스킨트, 자하 하디드 등의 디자인이 한데 섞인 풍경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어요. 내 디자인은 근원적으로 모두 그리드 시스템에서 나왔습니다. 전 거기에 깊숙이 빠져 있어요. 때로 탈출하려 하지만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난 공간도 물건도 그리드 시스템으로 정렬해놓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합리성, 균형성, 실용성에 지배당하고 있지요. 당분간 아마 그럴 겁니다.
타워팰리스나 하이페리온 같은 고급 아파트의 내부 설계도 하셨습니다. 주거 공간은 상업 공간과 어떻게 다른가요? 1998년 타워팰리스 설계 공모에 참여했습니다. 전문가, 건설업 관련자, 잠재 소비자를 50명 정도 모아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만장일치라 할 정도로 저를 택했습니다. 압도적인 지지였습니다. 스토리텔링으로 설득했거든요. 가족 구성원과 가족 프로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런 사람이 사는 50평대 아파트에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죠. 그러고 나서 내가 디자인한 평면을 보여주었습니다. “50평대 아파트에 왜 방이 4개나 필요합니까? 유학 간 아이 때문에 방 하나 놀고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옷장과 큰 신발장이 필요하시죠? 부엌이 중요하시죠?” 경쟁자가 그러더군요. 말을 너무 잘해서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요. 이 사건 이후 건설업계에서 ‘이종환’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싸움을 시작했어요. 건설사 관행으로 보면 수입 대리석이나 벽지를 붙이고, 데커레이션 월(wall)을 만들어야 분양가를 높이는데, 나는 페인트칠로만 끝냈으니까요. 10억 원이 훨씬 넘는 집이 왜 전부 똑같은 디자인뿐인지 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설계자는 기본만 디자인해주면 됩니다. 거주자가 살면서 그 공간에 삶과 생활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계자가 전부를 디자인해주면 새로 입주하는 사람은 그 집에 어울리는 가구를 들이기위해 기존의 가구를 전부 버려야 합니다. 내가 제안한 디자인이 건설 회사의 장사에는 도움이 안 되었겠지만 나와 우리 회사 직원들은 창의성이 없는 아파트 인테리어 디자인에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주거 공간을 모두 획일화하고 그런 곳에서 사람이 맞추어 산다는 건 창피한 일입니다. 디자인이 고객에게 고작 최면이나 걸어 계급을 확인할 수 있는 소속감을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1 1998년 타워팰리스 설계 공모에 참여한 이종환 대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그는 이 작업으로 고급 주거 공간의 트렌드를 주도하게 된다.
2,3 2000년 내부 설계한 현대건설 하이페리온 모습.
우리나라 아파트가 지나치게 획일화된 주거 공간이긴 하지만, 이 좁은 땅에서 이 거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만 디자인하자는 거죠. 저렴하게 공간을 팔자는 겁니다. 고객을 현혹해서 팔아먹는 장사치가 되지 말자는 겁니다. 현재 한국의 고급 아파트는 패거리 문화, 천민 자본주의, 무취향의 결과, 계급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파트는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대한 옷장과 신발장, 그럴싸한 부엌과 화장실이 아파트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되게 하는 데 제가 일조했습니다.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참회하고 있습니다. 큰 옷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옷을 버리게 이끌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두 해 입지 않은 옷이라면 버려야 합니다. 요즘은 잡지든 신문이든 TV든 대중의 소비 심리를 강하게 자극하는 통에 모든 사람이 물건을 끙끙 안고 삽니다. 큰 집에 살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해요. 물건을 사는 속도만큼 물건을 버리면 됩니다. 타워팰리스 내부 설계 공모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수십 켤레의 구두 중 여전히 애용하는 신발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큰 옷장과 신발장을 만든 건 잘못한 디자인입니다. 이게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물건에 둘러싸인 채 포위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수납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옴니디자인은 인테리어 디자인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많은 디자이너를 배출했습니다. 선배로서 후배 디자이너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요? 형태를 그리지 말고 생각을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디자이너 중에 그럴듯한 형태는 만들지만 왜 그런 형태를 만드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디자이너가 많습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설명도 할 수 없는 형태를 만든다면 ‘가짜’지요. 설명을 못한다면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디자이너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은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질문을 하면 ‘발전’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더욱이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에서 ‘발전’이란 단어를 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현재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건축물 중 어떤 것이 더 발전한 형태입니까? 옛날 한옥은 낙후된 공간입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의 중요성이 활성화되고 확장되었다고 말을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한국의 공간, 특히 인테리어 디자인은 상업성과 함께 활발해졌습니다. 신세계백화점이 발동을 걸었다면, 이를 터뜨린 건 롯데백화점입니다. 이를 통해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의 필요성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요즘은 공공 디자인에서조차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용산구청에서 보이는 행태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공간・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소수의 사람만 디자인의 혜택을 받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사람들이 디자인의 혜택을 받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착함, 선, 이로움, 이런 것이 공간 디자인의 목표이자 행위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비록 나는 그렇지 못했으나 후배들만은 이런 디자인의 모티브를 ‘한국’에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된 에너지를 만들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