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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호] 디자이너는 용병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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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기업은 디자이너를 아쉬울 때만 부르는 용병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특히 브랜드 가치에 관심 없는 기업인들이 그렇습니다. ‘아니, 브랜드 가치에 관심 없는 기업인이 있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히트 상품에만 열을 올리는 기업은 사실 브랜드에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브랜드라는 것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이고 문화이며, 그런 이미지와 문화는 기업이 히트 상품 몇 개 냈다고 단숨에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 갑자기 히트했다가 사라진 수많은 상품(브랜드)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런 상품들을 브랜드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브랜드를 키우려면 숲을 키우겠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마음 자세는 당장 히트를 쳐서 한몫에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참고 참고 또 참아서 하찮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는 것을 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마음 자세는 작은 성과들이 모이고 모이게 해서 어느 순간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다 보면 덤으로 얻는 것이 히트 상품이지요. 그 히트 상품이란 오랜 기간 축적된 브랜드 가치의 힘을 빌린 것이고요. 이것이 제대로 된 브랜드와 히트 상품의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 관계라면 히트 상품 하나 만들고 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히트 상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당장 이익을 못 만들어내도 커다란 숲으로 자랄 브랜드를 키우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까?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디자이너든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기업 환경이 히트 상품을 만들어내는 디자이너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를 용병처럼 또는 한철 장사를 위한 호객꾼처럼 부리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기업이 디자이너를 이처럼 용병이나 호객꾼으로 쓰는 것은 단골손님은 포기하고 영원히 뜨내기손님만 찾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업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브랜드를 키우는 디자이너입니다. 그것이 아트 디렉터라고 하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하든, 또는 수석 디자이너나 디자인 디렉터라고 하든, 용어는 상관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브랜드를 키우는 그 디자이너는 시류에 휘말리지 않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세월이 흘러도 흐트러지지 않게 굳건히 지키는 구실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정체성을 흔들고, 또 트렌드에 휘말려 정체성에 흠집을 내고, 애써 키운 브랜드 자산 가치를 한 번에 폐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집니다.) 다른 디자인을 보고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직시하여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차별화가 아니라 자기동일성 찾기입니다. 어떤 브랜드가 차별화만 좇는다면 영원히 뜨내기 브랜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디자이너는 특별히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가 정말 열정을 쏟아야 할 일은 가치의 축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디자이너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업 환경이 그런 디자이너를 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업문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문화,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 생활문화 자체가 뜨내기 같고 난민 같아서 당장 돈 안 되는정체성 찾기를 사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 당신한테 돈을 지불했으니 나에게 이익을 주시오. 지금 당장.”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화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딱 그 한계에 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엇비슷하게, 그럴듯하게 만드는 뛰어난 감각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실력으로는 진짜 고수들과 겨루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역부족입니다.
올해 iF 디자인 어워드의 심사위원장인 프리츠 프렝클러는 ‘브랜드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새롭고 기발한 디자인을 자꾸 생산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유지하고 연구하는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업과 디자인 문화를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디자인이 연속성을 가지고 힘을 축적하여 브랜드가 되기도 전에 허물어버리지요. 자기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인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자산이 조금 축적될만하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디자이너를 용병이나 호객꾼이 아닌 브랜드를 키우고 브랜드 자산을 축적하는 전문가로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 김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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